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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2월호 안보논단]트럼프 동맹시대의 위기를 기회로
2017.02.03 Views 1924 관리자
‘트럼프 동맹시대’의 위기를 기회로
윤상호 동아일보 군사전문기자(국제정치학 박사)
지난해 10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후보가 예상을 뒤엎고 대선에서 승리하자 한국의 외교·국방당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에 선을 댈 수 있는 ‘한국통’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트럼프 당선인의 친한파 인사는 에드윈 퓰너 전 헤리티지재단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후 발표된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등 조각(組閣)인사에서도 한국을 잘 아는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한(對韓)외교안보정책이 민주당 정권 때와는 다를 것이라는 전조로 보인다면 과민한 반응일까.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 유세 당시 한국과 일본 등 주요 동맹국의 ‘안보무임승차’를 맹비난하면서 방위비분담금의 대폭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는 미국이 ‘세계경찰’의 역할을 축소하고, 동맹에 더 많은 책임과 비용을 요구하는 ‘미국 우선의 신고립주의(America First Neo-Isolationalism)’를 추구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트럼프의 거친 언변과 기행만으로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속단한 결과 미국을 포함한 세계정세는 전환기적 사태를 맞을 것이라는 일부 전문가들의 우려는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까. 최근 사석에서 만난 보수 성향의 미 외교안보 싱크탱크 관계자는 “미국 주류 언론과 민주당이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대선 승리 예측에 실패한 것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실책이 컸다”고 지적했다. 심리학에서 ‘확증편향’은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과 일치하는 정보만 수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오류에 빠진다는 얘기다. 객관적 사실(fact)도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듣기 거북하면 무시하기 일쑤다. 주관이 깊숙이 개입된 ‘선택적 지각’은 사안의 본질을 흐려서 일을 그르치게 만들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미 주요 언론과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 측이 대선 판세를 완전히 오독(誤讀)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내년에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한국이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기 바란다”고 조언했다. 막연한 기대와 낙관으로 ‘트럼프 동맹시대’를 맞이하면 큰 낭패를 볼 거라는 경고로 들렸다. 실제로 최근 언론 보도와 정부의 태도, 전문가 분석 등을 보면 우려가 앞선다. 트럼프 당선인 측이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대목에 과도하게 주목하는 모습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마이클 플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가 뉴욕을 방문한 조태용 대통령국가안보실 1차장 등 한국 대표단에게 한미동맹을 ‘핵심 동맹(vital alliance)’이라고 언급한 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게 대표적 사례다. 이를 두고 외교·국방 당국자들은 ‘트럼프 불확실성’이 해소된 듯 안도하는 기류마저 감지된다. 한술 더 떠 트럼프가 백악관에 들어가면 ‘딴 사람’이 될 것처럼 예측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트럼프가 유세 기간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를 맹비난하면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전액 부담하라고 주장했지만 대통령으로 현실정치에 들어가면 한 발 물러설 것이라는 식이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이런 기류가 대미전략의 확증편향을 자초하는 단견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수사적 동맹’과 ‘현실적 동맹’을 동일시하는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은 정파를 초월해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철저히 고려해 동맹 관계를 조정해 왔다. 한국도 그 영향권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이 확고한 동맹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주한미군 감축과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 첨예한 현안을 관철시킨 기억이 생생하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명분과 실리를 다 챙기는 ‘동맹 관리 전략’인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도 같은 방식으로 한국에 더 많은 안보 책임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동맹이 중요하지만 셈은 정확히 하자”면서 ‘립 서비스’와 함께 ‘안보 청구서’(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전시작전통제권 조기 이양 등)를 들이밀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현실적 상황도 우려스럽다.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와 국방 예산 삭감, 동맹국 퍼주기 비난 여론 등 어느 하나 한국 안보에 도움이 될 것은 없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등 경제 분야에서 촉발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불똥이 외교안보 분야로 옮아 붙는 건 시간문제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렇게 되면 미국의 대한(對韓) 방위공약도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전략을 냉철히 분석해서 안보국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정부 당국이 보기 싫고, 듣기 거북하더라도 현실을 직시해 현명하게 판단할 때이다. 대미 동맹 전략의 확증편향으로 초래될 시행착오를 감수하기엔 한국이 처한 안보 상황이 너무 위태롭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 한국의 외교안보는 어느 때보다 험난한 파고를 맞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대미(對美), 대중(對中), 대북(對北)정책 등 어떤 분야도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우선 한미관계는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문제로 삐걱거릴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방위비분담금의 대폭적 인상을 요구하고, 한국은 이에 난색을 표하면서 양국간 갈등이 빚어질 소지가 크다. 일각에선 이를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되 대한안보공약을 강화하는 ‘윈윈(Win Win)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비한 미국의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의 실효적 강화 방안이 포함될 수 있다. 미 전략무기의 상시순환배치는 물론이고 미 전략무기에 대한 한미 공동지휘체제의 구축 방안이 검토될 수 있다. 미 핵전력의 작전 기획과 계획부터 훈련, 사용 결정 등에 한미 양국이 ‘50 대 50’ 의사결정체제와 통제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핵전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를 갖게 돼 사실상(de-facto)의 핵무장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국이 유사시 대북 핵 보복의 결정 체계에 참여할 경우 북한에 강력한 경고가 될 것이다. 미국은 현 확장억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안보 수요를 충족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중관계도 어느 때보다 거센 도전이 예상된다. 당장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공세’가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국 연예인의 중국 방송, 광고, 영화 출연의 전면 금지 등 “한한령(限韓令·한류제한령)을 발동한 중국은 사드 배치가 가까워질수록 경제·군사분야에서 전방위적 압박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해 12월 한국 해사생도가 탄 함정의 중국 입항을 취소하고, 서해에서 항모를 동원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은 그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은 탄핵 정국으로 약화된 한국의 외교적 입지를 이용해 사드 철회 요구를 밀어붙일 모양새다. 사드는 북한의 핵공격에서 미 증원전력의 핵심통로(항구, 비행장)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방어무기다. 또 사드 배치는 레이더의 전자파 유해성 검증과 주민 반발에 따른 입지 변경 등 우여곡절 끝에 한미 양국이 최종 합의한 사안이다. 중국의 보복이 두려워 사드 배치를 번복하는 것은 한미동맹의 근간을 흔드는 패착이 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야권도 ‘사드 흔들기’를 중단해야 한다. 국민의 생존과 국가 존망이 직결된 안보현안은 여야 모두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대승적 관점에서 보길 바란다. 정쟁의 도구로 안보가 농단되는 사태가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대북정책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북한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외교적 난제에 직면한 한국을 상대로 도발과 평화 공세를 병행할 가능성이 높다. 가령 한국과 중국의 사드 충돌 국면에서 북한이 대대적인 유화공세에 나설 경우 대북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또 탄핵 정국의 여야 분열을 틈타 다양한 전략·전술적 도발로 한국의 정국과 사회혼란을 부추길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강력한 리더십이 실종된 정부로선 어떤 상황이든 적절한 대응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대한민국호’가 총체적 난국에 직면한 지금이야말로 여야가 당리당략을 초월해 외교안보문제 만큼은 초당적 협력으로 난국을 돌파해야 할 때다.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대한민국의 외교안보 위기를 헤쳐갈 정치권의 협치(協治)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