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안

자료실

9월 자유지 안보논단]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확신케한 퀘백전투

2016.09.05 Views 2999 관리자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확신케 한 퀘벡전투

 

임성채

 

맥아더 장군에게 설득당한 작전회의

맥아더 장군이 19506.25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된 동인(動因)1759년 프랑스군과 영국군 간에 치러진 퀘벡전투(일명 : 아브라함 평야 전투)의 교훈이다. 그는 전쟁발발 4일째 되는 629일 한강전선을 시찰한 후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곧바로 미 극동군사령부 참모장 알몬드 소장에게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인천상륙작전 감행을 위해 한창 준비하고 있는데, 미 합참에서 인천은 상륙지역으로 적합하지 않다.’면서 군산, 주문진 등 다른 지역을 추천했다. 맥아더가 계속 인천을 고집하자,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은 미 극동군사령부에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셔먼 해군참모총장을 급파하여 맥아더 장군을 설득하기로 했다. 823일 급파된 미 육군·해군의 두 수장과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 극동군해군사령관 조이 중장, 7함대사령관 스트러블 중장, 1상륙전대사령관 도일 소장 등 미 해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상륙장소에 대한 역사적인 회의가 개최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회의 참석자들로부터 인천상륙작전의 문제점과 어려움 등을 청취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인천상륙작전의 실현 불가능성을 제시한 여러분들의 의견은 나의 작전계획을 더 확고히 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적의 지휘관도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는 말로 시작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야말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고 강조한 후 갑자기 191년 전에 있었던 캐나다의 퀘벡전투 교훈을 상기시켰다. “1759년 프랑스의 몽칼름 장군은 어떤 강력한 군대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퀘벡시 남쪽의 가파른 절벽을 절대로 기어 올라올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몽칼름은 적이 상륙하기 쉬운 곳, 퀘벡시 북쪽 강둑에 강력한 방어력을 집결시켰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제임스 울프 장군은 소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올라가 몽칼름이 절대로 기어 올라올 수 없다고 장담한, 바로 그 절벽으로 상륙했습니다. 울프 장군은 아브라함 평야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적의 허를 찌름으로써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식민지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몽칼름이 그랬듯이, 북한군은 인천상륙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것입니다. 울프가 그랬듯이, 나는 그들의 허를 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콜린스 장군과 셔면 제독을 비롯한 회의참석자들은 맥아더의 장군의 설명에 매료되어 오히려 설득당하고 말았다.

 

퀘벡전투의 경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지역 패권을 위해 17565월 몽칼름 장군의 부대를 북아메리카로 보냈고, 이에 영국도 1758년 앰허스트, 울프 장군의 부대를 북아메리카로 파병했다. 프랑스가 관할하고 있던 퀘벡지역 방어에 나선 몽칼름은 영국의 제임스 울프 부대가 퀘벡시 북쪽을 상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울프 장군과 그의 병력은 1759628일 퀘벡시의 20km 동쪽에 있는 오르레앙스(Orleans) 섬에 도착하고, 이날 세인트로렌스 남쪽 강안에 병력을 배치시키고 퀘벡의 로우어 타운(Lower Town)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다. 이어 울프 장군은 731일 뷰포트(Beauport)에 병력 3,500명을 파견했으나 프랑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했다. 뷰포트전투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7배 이상인 4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울프의 부대는 뷰포트전투에서 패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강 건너에 남아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영 내 전염병이 발생하여 전투요원들이 감소되어 갔고, 설상가상으로 울프 자신마저도 819일 신경과민 증세로 인하여 병상에 누워야만 했다. 9월 초 맑은 정신과 함께 건강을 회복한 울프 장군은 직접 정찰을 통해 상륙위치를 도시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만인 앙즈 오 풀롱(Anse-aux-Foulons)으로 선정하고, 겨울이 시작되는 10월 이전에 어떤 방법이던 결판을 내야 된다고 생각했다.

상륙위치는 퀘벡시로부터 불과 남서쪽 3km에 떨어진 가까운 곳으로서 53m 높이의 가파른 절벽과 적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제외한 다른 장소들은 천연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비교적 상륙이 쉬웠지만, 울프는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강한 전투 활동을 펼칠 수 있고, 성공가능성이 있는 곳이다.’라고 하면서 이곳을 선택한 것이다. 울프의 병력 5,000명은 공격개시일 912, 야음을 틈타 포인트 레비(Point Levy)에서 출발했다. 프랑스 측 초병들이 몇 척의 함선을 발견했지만, 그날 밤 통과하기로 되어있던 프랑스 보급선단으로 착각함에 따라 영국군은 탐지되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

댓글 0개

비밀번호 확인
작성 시 설정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