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안

자료실

6월 자유지 권두언] 6.25 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잊지말자

2016.06.01 Views 2196 관리자

6.25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잊지말자.

김준봉(,육군소장)

 

 

66년 전 625.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합의로 치밀한 준비를 갖춘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민족간의 가장 큰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98,000(그중 35,000명은 비무장)이던 한국군은 6월말 22,000명이 되었다가 재집결 후 54,000명이 됨으로써 초전에 44,000명의 병력 손실과 소화기의 30%가 손실되었다.

3일만에 수도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한국군이 와해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없이 전쟁을 맞이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북한군이 그대로 남진하였더라면, 대한민국은 건국한 지 채 만 2년이 되기 전에 이 지구상에서 소멸할 수도 있었을 위기의 순간이었다.

 

구원의 손길은 미 트루만 대통령에게서 왔다. 어느 일요일처럼 가족과 더불어 미주리주에 가 있던 트루먼은 딸 마가렛으로부터 국무장관 에치슨에게서 온 전화를 넘겨 받고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무력 침공했다는보고를 받는다. " ,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그 개자식들 ( S.O.B: Sons Of Bitches) 을 막아야 해" 라는 트루먼의 일갈에서부터 미국의 참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627, 트루먼은 38선 이남에서의 미군의 해·공군 사용을 맥아더에게 허용하였다. 전장 상황 보고를 위해 629일 한강 남안에 와서 현장을 관측한 맥아더는 630일 새벽 3, " 한국군에게 종합적 조치를 취할 능력은 없고 돌파당할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보고를 대통령에게 하자. 트루먼은 동일 0457, 미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였다. 6,000 마일의 태평양을 넘어 군대를 파견하고 군수지원을 해야 하는 이 결정이 대통령 재임간 트루먼이 직면하였던 가장 고뇌에 찬 결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627일 안보리 개최에 소련 대표 마라크가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아직까지 수수께끼이다. 미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전하면서 유일하게 유엔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경우가 바로 6. 25전쟁이었다. 트루먼은 미국 참전을 `유엔의 경찰 행위 (police action) 로 명분을 세워 유엔 16개국의 군대와 기타 지원국 6개국, 21개국이 참전하는 ` 유엔의 전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비록 15개 유엔 참전국 군대를 다 합친 것보다 10배 이상 미국 군대가 많긴 하였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6. 25전쟁에 미군 연병력 179만 명을 포함해서 유엔군 연병력 572만 명이 참전하였으며 14224명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는 미군 장성의 자녀 35(참전 142) 도 포함되어 있다. 다음은 6.25 전쟁을 이야기 할때에 반드시 생각해보아야할 중요한 사항들이다.

 

 

· 개전시, 공격부대는 순수한 북한군인가?

북한군 5, 6 사단은 사단장 이하 전 사단 병력이 한국인이었지만 중공군 사단으로 전투해 온 부대이며, 1, 4사단은 연대장 이하 전 연대원도 한국인이 소속된 중공군부대가 중추가 되어 구성된 사단이었다. 이러한 병력이 45,000 내지 70,000명이었고, 이들이 북한군 창설의 기간요원이었으며, 전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 미국은 전쟁에 투입할 병력이 있었던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당시 1,200만 명이던 미국군은 1950160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100개 사단, 810만 명이던 육군은 9개사단 596,000 명이었다. 9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이 일본 점령군이었고 그나마 감소 편성 (연대가 2개 대대) 이었다. 점령군이라 집결보유가 되지 않고 소부대 단위로 일본 민가에 하숙하고 있었다.

19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로 30만 명이 징집된 신병들로 충원되었고, 이들은 일본 하숙집에서 하우스 보이를 두고 직장인처럼 생활하다가 출동하게 되었다.

 

· 급작스러운 지상군 투입에 따른 맥아더와 워커의 `작전개념`

전쟁초기 한반도에 파병된 부대는 미 본토로부터의 증원군과 유엔참전국 군대의 도착시까지 공간을 내어주며 `시간` 을 벌기 위해 지연전과 방어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버티느냐가 작전의 핵심이었다. 최초 파병시 미군이 휴대하고 있던 2.36인치 로켓포로는 T34전차를 파괴할 수 없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수 없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북한의 T34전차의 남진을 저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후 3.5인치 로켓트포가 610일부터 생산에 들어갔고 712일에서야 교관과 함께 도착하였다. 당시 딘 사단장은 사격방법을 직접 배워 대전 시가전에서 T34 전차 1대를 최초로 파괴하였다.

 

· 초기UN군의 지휘체계와 참전부대들

710일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워커는 712일부터 8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714일 한국군 작전통제권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되었다. 717일 한국군 지상군의 작전통제권을 8군사령관이 인수하였다. 이 때 워커 휘하에는 미 24, 25, 1 기병 3개 사단과 한국군 5개 사단이 있었다. 718일 미 1 기병 사단이 도착하였다.

 

· 북한군과 미 육군의 최초 교전 상황

한국에 가장 가까운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은 1개 대대를 수송기로 부산에 이동시킨 뒤 포병대로 증강하여 기차로 대전에 도착시켰다. 대전에 도착한 대대는 트럭으로 오산 북방 6마일 지점까지 전진하여 33대의 전차를 앞세운 10,000여 명의 북한군과 750816분에 교전하였다. 이후 24사단이 대전을 떠나던 21일까지 17일간의 시간을 벌기 위해 24사단이 지불한 대가는; 사단장 실종, 연대장 손실 3, 대대장 손실 6, 연대 작전 주임 손실 2명을 비롯, 1개사단을 장비할 무기와 장비를 잃고 15,965 명의 사단 병력중 8,660명의 손실을 입었다. 24사단은 `시간`을 벌기 위해 던져진 `희생양`이었다. 정전시까지 대한민국은 우리 국민의 노력만으로 건국하고 지켜낸 나라가 아니며 자유진영의 많은 나라 젊은이들의 생명과 피와 땀으로 지켜낸 나라이다.

 

보훈처의 최근 몇 년간의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참전 용사가 방문하면서 약속이나 한듯이 꼭 같은 소감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60여년 전 자기들의 어려움과 고난이 `보람이 있었다`는 감동적인 얘기였다. 나는 우리 국민이 우리를 도왔던 자유진영 모든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보며 `보람`을 느끼게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외교, 국방 정책 등 두 가지 관점에서 수립된다. 그것은 ` 국가 이익``국가 안보`이다. 우리가 미국과의 동맹을 튼튼히 유지하자면,

댓글 0개

비밀번호 확인
작성 시 설정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