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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자유지 안보논단] 역사 속에 살펴본 독도문제의 원인(2)
2016.05.04 Views 5393 관리자
역사 속에 살펴본 독도문제의 원인(2)
김병렬 국방대학교 안전보장대학원 교수
당시 「독도 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했던 나카이 요자브로는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작성한 이력서를 보면 “이 섬이 울릉도에 부속되어 조선의 영역인 것으로 생각하여 장차 통감부에 이를 요청하고자 상경하여 여러 가지로 획책하던 중” 내무성 당국자로부터 “이 시기를 맞아 조선의 땅이라고 의심이 되는 황막한 일개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암초를 거둠으로써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여러 외국으로부터 우리나라가 조선병합의 야심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의심을 크게 사는 것은 이익은 매우 적은데 반해 결코 용이하지 않으므로 어떠한 변명과 진술을 하더라도 각하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즉 출원서를 제출하려는 나카이 요자브로나 이를 허가해주는 내무성 당국자나 모두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무성 당국자의 불허방침에 낙담하였던 나카이 요자브로는 외무성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山座圓二郞)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하게 되고 야마자 엔지로는 “시국으로 보더라도 그 영토편입이 시급히 요구되며, 망루를 건축하고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면 적함 감시상 지극히 유리하며, 특히 외교상으로는 내무성과 같은 고려를 요하지 않으니 속히 원서를 본성에 회부시키라”고 하면서 나카이 요자브로를 고무시킨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외교적인 우려(조선 병합의 의심을 사게 되는 것)를 외무성이 아닌 내무성의 당국자가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편입원을 내무성이 아닌 외무성으로 내라고 한 것이다. 결국 나카이 요자브로 자신도 외무성 정무국장의 지시가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외무․내무․농상무성으로 제출했던 것이다.
여기서 청원이 정상적인 것이었다면 외무성은 당연히 독도가 조선의 영토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고, 그 결과를 받아서 내무성이 편입여부를 결정하면 농상무성이 나카이 요자브로에게 강치사냥 허가를 내주든지 말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무성은 독도가 조선의 영토인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니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했던 것이다.
이미 1870년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에 부속하게 된 시말」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고, 내무성에서 1876년에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모든 문서를 조사한 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령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태정관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의 확인 결재를 받은 바 있기 때문에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츠카 쥬와지(大槻修二)가 1886년에 발간한 『개정일본지지요략』에 독도를 “오키의 서북 해상에 마츠시마(松島), 다케시마(竹島)가 있는데 두 섬은 거의 1백리 정도 떨어져 있고, 조선에서는 울릉도라 칭한다. 근래 그 나라의 속도(屬島)로 정해졌다고 한다.”고 되어 있으며, 1900년에 쓰네야 세이후쿠(恒屋盛服)가 식민사관에 기초하여 편찬한 『조선개화사』에도 울릉도를 설명하면서 “주변에 크고 작은 6개의 섬이 있다. 그중 저명한 것이 우산도(일본인은 마츠시마(松島)라고 한다), 죽도 등등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편입의 주무를 담당했던 농상무성 수산국장 마키 보쿠신(牧朴眞)이 발간사를 쓴 『한해통어지침』, 해군성 수로국장 기모스키 가네유키(肝付兼行)가 발간한 『환영수로지』․『조선수로지』는 물론 외무성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가 독도편입 1년전인 1904년에 서문을 써서 발간한 『최신한국실업지침』 등에 모두 독도가 조선령이라고 명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당시나 지금이나 태연하게 무주지를 편입한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끈질긴 굳히기 작전
이처럼 독도를 편입한 일본은 다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독도가 자기네 것이라고 하는 온갖 표시를 다음과 같이 하게 된다. 마치 도둑질한 물건에 자기 것이라는 표시를 하듯이....
1905년 1월 28일 각의에서 편입을 의결한 후 망설이다가 2월 15일에서야 내무대신이 시마네현 지사에게 편입사실을 고시하도록 지시한다. 이 지시에 의하여 동년 2월 22일 시마네현 지사는 독도의 편입을 고시하였으며, 동년 5월 관유지 대장에 등재한다. 동년 8월 19일 시마네현 지사 마쓰나가 무기치(松永武吉)가 독도에 상륙하여 시찰하고, 이듬해인 1906년 3월에는 시마네현 3부장 가미니시 유타로(神西由太郞) 등이 독도를 시찰한다.
1905년 4월 14일 현령 제18호로 독도에서의 강치사냥과 관련하여 「어업취체규칙」을 개정하였으며, 러일전쟁 중임에도 7월 2일 나카이 요자브로에게 강치사냥을 허가하였고, 이들의 강치 남획으로 독도가 황폐화되자 어장규정에 독도에서의 강치사냥을 규제하는 조항을 삽입하였으며, 1908년 「어업취체규칙」을 개정하여 독도주변에서 강치사냥 이외의 어업을 금지하였다.
1906년부터 관유지로 등재한 독도를 나카이 요자브로 등에게 대여하고 사용료를 징수하였으며, 1926년 오키도청의 폐지에 따라 오키지청으로 소관을 변경하고, 1939년 고가촌(五箇村)의 구역으로 편입하였다. 1939년 고바야시 겐타로(小林源太郞)에게 인광시굴권을 허가하고, 1940년에 독도를 해군용지로 변경하여 마이즈루진수부(舞鶴鎭守府)의 관리하에 둔다. 마이즈루진수부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야바다 조시로(八幡長四郞)에게 용지의 사용을 허가하고 사용료를 징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45년 11월 1일 국유재산법시행령에 의해 독도를 해군성으로부터 다시 대장성으로 이관하였다. 1952년 1월 18일 한국이 평화선을 선포하자 의도적으로 동년 7월 26일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따른 행정협정 제2조를 빙자하여 독도를 주일 미군의 해상연습 및 훈련구역으로 제공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자국령으로 인정받고자 하였다. 한국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1953년 3월 19일 독도가 연습구역에서 해제되자 독도경비대의 주둔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6월 19일 시마네현 고시 제35호로 독도 주변 수역에서의 강치사냥권을 오키도어업협동조합연합회에 면허하고 동일부로 하시오카 츄초우(橋岡忠重)에게 사냥을 허가한다.
1959년 히고 쿄우(肥後亨)가 의도적으로 독도에 주민등록을 하였다가 거주가 불가능한데도 국가가 그 의무를 태만히 하고 있다면서 1960년에 국가를 대상으로 5만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가 패소하였으며, 1961년에는 츠지토미 조우(辻富造)가 1954년 인광석 채굴허가를 받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여 채굴을 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시마네현에서 광구세를 부과하고 있다며 ‘광구세 징수의 위법성과 납부의무 부존재의 확인’과 국가에 손해배상의 지불을 구하였다가 패소하였다.
우리의 경비대가 있기 때문에 거주나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강치사냥허가를 내주고, 주민등록을 하고, 인광허가를 내주는가 하면 이를 빌미로 소송을 하는 것 등이 모두 독도가 자기들 것이라고 억지로 표시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일본은 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향후의 과제
독도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문을 중시하고 무를 천시하는 우리민족의 고질적인 병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구가 침탈하면 수군진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막아야함에도 정반대로 섬에 사는 백성들을 강제로 육지로 이주시킨 것이 오늘날 독도문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공도정책을 틈탄 일본의 울릉도․독도 불법적인 침범은 2차례에 걸친 안용복의 도일활동을 계기로 하여 양국이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1905년에 무주지라고 강변하면서 독도를 편입했다. 따라서 이는 당연히 불법적이고 원인무효인 행위인 것이다. 또 원인무효인 편입을 근거로 하여 이후에 이루어진 강치사냥 허가, 주민등록 허가, 인광석 채굴허가 등은 모두 법적인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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