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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자유지 안보논단] 역사속에 살펴본 독도문제의 원인(1)
2016.03.31 Views 6156 관리자
역사속에 살펴본 독도문제의 원인(1)
김병렬 교수 국방대학교 안전보장대학원
지난 2월 22일 일본은 시마네현(島根縣)에서 예년과 같이 다케시마(竹島)의 날 행사를 진행했다. 연례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이제는 국내에서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도 그러한 행사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독도문제가 완전히 물밑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독도의 영유권을 가지고 일본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을 겨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이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독도문제의 원인
고려시대 삼별초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던 조정은 삼별초세력의 확장도 막고 왜구의 침탈도 저지하기 위하여 서남해안의 섬 안에 거주하던 백성들을 모조리 육지로 데리고 나오는 정책을 추진한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거제도는 1271년에, 진도는 1350년에, 남해도는 1351년에서 1374년 사이에 백성들이 한 사람도 살지 않는 빈 섬이 되었으며, 그밖에 압해도, 흑산도, 장산도 등의 섬들이 모두 공도화(空島化)되었다. 삼별초세력과 그 동조세력을 역도(逆徒)로 간주했던 고려왕조의 입장에서 만에 하나 삼별초세력이 왜구와 손을 잡는다고 하면 큰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공도조치(空島措置)를 수행하면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려 말의 이러한 공도조치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더욱 강화되고 전면화되었다. 일시적인 ‘조치’의 차원을 넘어서서 법으로 까지 규정하는 하나의 국가 ‘정책’으로 자리잡아 갔던 것이다. 허락 없이 섬에 잠입한 자는 장(杖) 1백대의 형을 받는 것으로 규정하였으며, 섬으로 도피은거(逃避隱居)한 자는 모반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게다가 세종 때 대마도 정벌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왜구의 침탈 또한 빈번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왜구들이 섬의 백성들과 야합하여 본토를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필요 이상으로 강경하게 공도정책을 추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조에서 서남해안의 섬들에 대해서만 시행되었던 공도정책이 동해안까지 확대 추진되어 울릉도 역시 1430년경에는 완전히 빈 섬이 되고 만다.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군현(郡縣)이 철폐되었으며, 몰래 섬에 들어가 살고 있던 주민들은 불법 체류자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졌다.
이처럼 섬이 비워지게 되자 왜구들이 침탈의 징검다리로 이용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중국의 황당선(荒唐船)까지 사수도와 추자도 등지에 출몰하면서 조운로(漕運路)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조운로가 위협당하게 되자 진도, 완도, 위도, 고금도, 청산도, 흑산도, 고돌산도, 신지도 등에 황급히 수군진을 설치하게 되지만 울릉도는 1883년 재개척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공도정책이 계속된다.
이처럼 울릉도가 빈 섬으로 장기간 방치되자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출입을 하다가, 1625년에 독점적인 어로활동을 위하여, 오야 징기치(大谷甚吉)와 무라카와 이치베에(村川市兵衛)가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로부터 독점적인 어로면허를 받게 된다. 이후 두 집안이 교대로 울릉도에 와서 전복을 잡아가는 행위가 1693년까지 계속된다. 이 때 두 집안은 독도를 울릉도로 항해하는 표지로 삼기도 하고 울릉도에서의 어획량이 적을 때는 독도에서 추가적으로 전복을 잡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어로행위는 1693년과 1696년 2회에 걸쳐 도일한 안용복의 활동에 의해 수차례 조선과 공문을 주고받은 끝에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다.
일본의 독도침탈
안용복의 활동을 계기로 가까스로 되찾아왔으면 관리를 철저히 했어야 하는데 그 후에도 울릉도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함으로써 메이지유신(明治維新)후에 다시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살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독도를 재인지하게 되며, 1903년부터 나카이 요자브로(中井養三郞)라는 사람이 독도에서 강치(바다사자)를 사냥하게 된다.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처음에 러시아의 기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호를 격침시키고 러시아 해군 제일의 전략가였던 마카로프제독을 전사케 하는 등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하지만 5월에 들어서 요시노(吉野), 가스가(春日)의 충돌 침몰, 하츠세(初瀨), 야지마(八島)의 기뢰접촉 침몰 등 해군력의 거의 1/3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에는 무쓰마루(常陸丸)와 이즈미마루(和泉丸), 사도마루(佐渡丸)가 격침되며 여기에 승선하고 있던 근위후비연대 1,095명이 수장되는 등 완전히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일본 군부는 요동반도로 파견된 일본군의 고립을 면하기 위하여 동해상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함대의 군함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미 일본은 “조선에 관해서는 여하한 경우라도 실력으로써 우리의 권세 아래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각의에서 결정한 후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필요한 부지를 마음대로 수용할 수 있도록 법적인 제도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군함이 차례로 격침되어 전력이 약화되자 다급해진 일본 해군은 기 체결된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6월 27일부터 7월 22일까지 죽변․울산․거문도․제주도 등 전략적인 지점에 망루를 건설하고 이들을 해저전선을 통해 연결하게 된다. 그리고 울릉도에도 망루를 건설하여 죽변과 해저전선을 통해 연결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망루 건설부지는 주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무단으로 징발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또다시 다카시마마루(高島丸)를 비롯하여 많은 함정들이 격침당하게 되자 일본은 할 수 없이 여순을 함락시키지 못했음에도 부득이 중순양함 6척 중에서 4척을 뽑아 대한해협에 배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울릉도의 동남부와 서북부의 2개소에 긴급히 망루를 건설하여 9월 2일부터 사용하면서 25일까지 해저전선을 부설한다.
한편 러시아는 울산해전에서 블라디보스토크함대가 패배하게 되자 발틱함대의 동파(東派)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9월 22일 울산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수리를 완료하고 출동했다는 첩보까지 입수하게 되자 일본 해군은 다급해졌다. 발틱 함대의 도착도 문제였지만 우선 전력을 회복한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에 의한 대한 해협의 봉쇄가 더 다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은 울릉도 망루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독도에 망루를 추가적으로 설치해야겠다고 계획하게 된다. 울릉도 망루공사와 공사를 위한 보급 활동을 하는 가운데 인접한 독도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입수하게 된 일본 해군이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재인식했던 것이다.
니이다카마루(新高丸)와 쓰시마마루(對馬丸)를 통해 독도를 정찰하도록 한 일본 해군성은 서도 동쪽면의 하단부와 동도 남단의 평탄지에 망루를 설치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시급히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고자 하나 엄혹한 겨울 날씨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듬해 봄까지 기다리게 된다. 1월 9일 발틱함대가 수에즈운하를 지났다는 보고를 받은 해군성은 망루설치를 위하여 내무성에 독도편입을 위한 각의개최를 비밀리에 요청하게 된다. 요청을 받은 내무대신은 1월 10일 총리대신에게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공문을 보내 각의 개최를 요청하고, 28일 해군상 등 11명의 각료가 참석한 각의에서 독도편입을 결정한다. 군부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내각에서 군사상 필요한 독도를 편입하겠다는데 반대할 각료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는 시마네현 지사에게 2월 22일 편입사실을 공고하도록 했던 것이다.
편입 후에는 엄혹한 겨울 날씨와 블라디보스토크 함대와의 전투 등으로 망루를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가 ‘일본해 동수역 총합시설계획’에 의해 울릉도에 추가 망루 1개소와 독도망루를 8월 19일까지 건설하게 된다. 그리고는 울릉도에서 독도를 거쳐 일본의 마쓰에(松江)까지 해저전선을 부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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