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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자유지 안보논단] 도산 안창호의 문명국가 꿈과 3.1 운동
2016.03.08 Views 3526 관리자
도산 안창호의 문명국가 꿈과 3ㆍ1운동
이정은
(사) 3ㆍ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문학박사
스무살 총각시절 애국운동에 뛰어든 도산 안창호에게는 예순 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던 단어가 있었다. “문명”이라는 단어였다. 도산의 모든 생각과 활동은 ‘문명’ 이 글자를 향해 있었다.
도산이 지켜본 조선말의 사회는 거짓과 협잡이 만연한 사회였다.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는 양반들이 퍼뜨려 놓은 악이었다. 19세기 100년 동안 홍경래난(1811-1812), 임술민란(1962)이 일어났고, 대원군 개혁과 고종의 친정 이후에도 임오군란(1882)과 동학농민운동(1894-1895)이 일어났던 것이 관리들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도산은 이런 현실을 개탄했다.
“슬프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민족의 생활이 소위 하급이라고 일컫는 평민들은 실지로 노동력작하여 살아 왔거니와 소위 중류이상 상류인사라는 이들은 농사나 장사나 장색이나 자신의 력작을 의뢰하지 아니하였고 그 생활의 유일한 일은 협잡이었습니다. (중략) 이것이 후진인 청년에게까지 전염이 되어 조선사회가 거짓말화되고 말았습니다.”(「사람마다 가슴에 참을 모시어 공통적 신용을 세우자」,『동광』2, 1926.6)
1902년 더 큰 배움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도산은 본래 한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문명적 자질을 계발하고, 서양의 문명적 지식과 습관으로 개명하여 세계에 당당한 문명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산은 그러한 삶의 원칙을 몸소 실천하며 주변에 확산했다. 그 예가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벌인 한인 다툼 해결과 청소 및 환경개선운동이었다. 도산은 말했다.
“이웃을 위하는 것이 문명인의 도리요, 여기서 한국인이 미국인에게 불쾌하게 하면, 우리 민족 전체를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오?.”
도산은 해외에서 한민족이 문명국민으로 대접받기를 바랐다.
“미국 과수원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
도산이 리버사이드 감귤농장 한인동포 노동자들에게 그렇게 강조했던 것도 문명적 국민의 행동양식과 마음가짐을 강조한 것이었다.
미국 현지 사회는 한인 사회가 도산의 지도력 아래 변화되는 것을 예민하게 지켜보았다. 한인들이 다니던 교회 미국인 목사는 무려 1년간이나 한국 노동자들의 생활 태도와 성적을 조사하고는 한인들의 정직하고 성실함에 감명을 받아 감사잔치를 열었다.
초기 정착기간 동안 미국사회에서 겪은 이러한 경험은 도산에게나 한인 동포들에게 수준 높은 문명적 태도가 가져오는 결과가 어떠한지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이 때문에 동포들은 도산의 문명주의를 더욱 믿고 따르게 되었다.
3ㆍ1운동은 도산의 문명주의에 완전히 부합하는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선언서는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장(杖)하여” 독립선언을 했으며, 폭력에 호소하지 않은 3ㆍ1운동의 문명적 방식은 숭고했고, 비장했다. 그 행동지침을 제시한 공약삼장에서,
一, 금일 오인의 차거(此擧: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중략)
一,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3ㆍ1운동은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민족감정이나 증오심에 호소하지 않았다. 통일적인 지도기관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이름 없는 만세시위자들은 일본인 재판정에서 “4천년 문화민족이 어떻게 일본의 노예로 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한국 역사 문화가 가지고 있는 “문명주의”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 주었다.
도산은 이러한 3.1운동의 문명주의 정신과 시위양상이 미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1919년 12월 도산이 상해에서 혁신공보 기자와 가진 회견기사에서 도산의 그러한 생각을 알 수 있다.
“3월 이후로 금일까지 이르도록 우리의 피로 눈물로 활동한 결과는 세계에 대파동을 일으키었소. 종종의 서양신문잡지를 보면 어느 신문잡지상에든지 우리 국민의 독립운동이 문명적이오, 정의인도적임을 무수히 찬양하였소. 어찌하면 그렇게 강악한 일본의 무력하에서 돌 하나 안 들고 나무하나 안들고 맨 주먹으로 맨손으로 백절부굴하고 총검을 저항하며 일구여산(一口如山)으로 끝끝내 부르짖었는고. 이는 인류역사 이후로 초유한 문명적 운동이라 칭찬하였소.”
3·1운동에 대한 비인도적 탄압으로 일본의 야만성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문명”을 명분으로 내건 일본의 한국 지배의 실상이 “야만”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20세기 국제정세는 점차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소련의 전체주의로 대표되는 야만주의가 가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세계는 야만국가 대 문명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대결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은 그 세계적 전선의 제일선에 있었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일본의 야만성에 대비되는 한민족의 문명주의를 세계인의 양심과 양식에 지속적으로 호소하여 문명적 가치의 연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연대 대상이었다.
3ㆍ1운동을 야만적으로 탄압한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전역을 전쟁의 재앙으로 몰아가게 되었다. 이에 대항했던 한국인들은 자신이 미쳐 깨닫지 못한 운명 즉,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문명국을 건설하여 세계에 희망이 되는 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 세계에 보인 기적은 그냥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 민족이 지닌 문명적 자질이 자유체제하에서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 북한동포들의 참상은 자유가 없는 체제하에서는 어떠한 문명적 자질도 시들 수 밖에 없음을 똑똑히 보여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