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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자유지 6월호 안보논단] 우리가 알아야할 인본의 역사인식

2015.06.04 Views 2135 관리자

일본의 역사 인식과 우리의 자세  

() 육군중장 선 영 제

2015년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은 해이다. 한국은 광복(光復)과 분단 70, 중국은 종전(終戰) 70, 일본은 패전(敗戰) 70년이 되는 해이다. 한중일 모두에게 올해는 의미 있는 한해인 것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2천년의 업장(業障.karma)이다. 또한 우리의 근대사에서 일본을 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인접한 국가가 화목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사에서 가장 쓰라린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양국의 역사는 증오와 유혈의 역사였던 은원(恩怨)이 깊은 2천년이었다. 그 큰 흐름은 침략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일본은 과거 60년 동안에 크고 작은 전쟁을 7번이나 치렀다. 그들은 1894년의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1904-1905년의 러일전쟁을 거쳐,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1927년의 산동(山東) 출병, 1931년의 만주사변, 1937년의 중일전쟁, 그리고 1941-1945년의 제2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다른 민족으로서는 단 한 번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참혹한 전쟁을 매 10년마다 치렀으면서도 일본은 재기하고 부흥했다. 일본인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고 위협을 가해 왔는가. 일찍이 3국 시대부터 왜구로서 우리나라를 빈번히 침탈했다.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7년 동안 우리나라를 초토화 했다. 구한말에는 강화도 침략을 통한 강화도조약(1876), 갑신정변 배후 조종(1884), 경복궁 점령(1894), 청일전쟁(18945), 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사건, 1895), 러일전쟁(1904-5), 한반도 강점(19010-1945) 등 숱한 역사적 비극을 초래했다. 남북분단이 된 것도 근본적으로 일본의 강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왜 그리 호전적이었을까? 멀리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에서 발원하여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을 거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로 이어져 내려온 대륙론자들의 정한론(征韓論)은 일본무사들의 전형적인 불만의 배출구였으며 생존의 활로였다. 스승 요시다 쇼인이 국사범(國事犯)으로 목이 잘려 죽었을 때 모든 선배들은 몸을 피해 도주했지만, 열여덟 살의 막내 이토 히로부미는 목 잘린 스승의 시체를 껴안고 제가 스승님의 뜻을 이루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그들에게 명분이나 도덕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정한론의 핵심에 서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3년의 어전회의에서 조선 정벌을 주장하다가 개전구실을 묻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조선의 정벌을 위해 일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 개전의 구실이 분명하지 않다면 나를 조선에 파견하라. 내가 조선의 조정에 도착하여 그곳 대신들을 몹시 분개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나를 죽일 것이니 그때는 나의 죽음을 구실 삼아 조선을 침략하라. “나의 시체를 넘고 조선을 침략하라는 그의 말이 놀랍다.

일본이 왜 그토록 호전적인가에 대하여 일찍부터 고민한 사람은 의외로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였다. 그는 법의 정신에서 일본을 거론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일본인에게는 종교적 죄 의식이 없어 가혹하다.해상의 패권을 장악하는 민족은 오만하다. 그러므로 해양민족은 이웃한 국가에게 고통을 준다.’고 하였다.

1748년에 그런 글을 쓴 몽테스키외의 학문적 예지(叡智)에 놀랍다. 일본은 도서민족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 폐쇄공포증(closed Island-phobia)을 가슴에 담고 있으며 국경은 그들이 부수고 넘어야할 우리(fence)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일본의 그러한 공격본능이 상대에 따라서 다르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문화 인류학자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일본민족을 가리켜 약한 먹이를 만나면 칼을 뽑고, 강한 자를 만나면 국화를 내미는 민족이라고 표현 했다. 그들은 속마음과 겉치레가 다른 민족이다. 이 대목에서 한국은 약한 먹이로 그들의 눈에 비쳤다는 사실이다.

야마가타의 외교정략론은 조선 확보를 위해 군사력 행사도 불사해야하며, .러의 대립 속에서 조선을 방어하기 위해 영,독과의 연합 및 청일협조가 필요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의 확보에 있었다.

이 무렵에 정한론을 주도한 것은 민간의 우익들이었다. 정부차원에서 조선 침략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던 일본 위정자들은 청년 우익들을 동원했는데 이를테면, “일본의 북쪽 국경이 적어도 흑룡강까지는 올라가야한다.”는 일념을 안고 있던 흑룡회(黑龍會) 등이 정부의 비호아래 조직되었다.

그들 가운데 중요한 또 다른 인물은 일본의 만주 주둔 정보장교였던 사코우 가게노부(酒勾景信:1850-1891)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1878)한 그는 18809월에 청국으로 파견되어 4년을 보냈다. 그의 주요 업무는 만주에서 군사 활동에 필요한 지지(地誌)의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변조함으로써 일본 고대사에서 이미 신공황후(神功皇后)가 가야(伽倻)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이론을 뒷받침해준 인물이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육군중위가 이역만리의 오지(奧地)에 들어가 1,500년 전에 세워진 옛 비석을 찾아 그것을 판독한 다음, 그것을 자기 민족에게 유리하도록 변조했다면 그 행위는 비난 받아야 하고 역사학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력과 우국적(憂國的) 열정은 평가 할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인사는 찾아 볼 수는 없을까.

일본의 역사왜곡의 시작은 일왕(日王)을 단죄 안한 도쿄전범재판이었다. 일본 역사의 권위자인 미국 허버트 빅스 교수는 일본 역사 왜곡은 뿌리가 깊다. 히로히토(裕仁.1901-1989) 일왕의 전쟁 범죄를 단죄 하지 않은 도쿄 전범재판이 그 시작이다. 미국이 주도한 도쿄전범재판(1946.5-1948.12)에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를 비롯한 A급 전범 7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6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히로히토 국왕에 대해선 전쟁에 직접 개입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소하지 않았다. 빅스 교수는 히로히토 국왕은 군부 강경파손에 놀아난 꼭두각시가 아니라 중일전쟁과 진주만 침공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배후 조종자였다.”면서 도쿄 전범 재판 이후 일본인들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면 일본 국민도 책임질 필요기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역사관에 대해 알아본다. 일본인의 역사를 보는 시각은 자기편에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은 역사 바로 세우기나역사인식을 중시하나, 일본인은 역사를 가볍게 여기고, 실제로 역사인식이란 무의미한 것으로 이해한다. 물이 흘러가는 역사관을 가지고 처세도 시류에 따르는 것을 당연시 한다. 처신은 대세(大勢)’시류(時流)’의 역사관과 일체화되어 승자는 정의다’, ‘큰 나무에 기대어등의 속담이 깊이 스며들어있다. 한국인의 역사관은 정통사관이고, 일본의 역사관은 대세사관으로 정사가 없다.

또한 일본은 무섭다 못해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IS(Islam State)에 일본의 두 명이 인질로 잡힌 것은 작년 10월이었고, IS와의 물밑 협상이 진행되고 있을 때 아베총리가 중동에 가서 “IS와의 전쟁에 2억 달러를 지원하겠다.”IS를 코앞에서 도발한 것이다. 아베 발언 직후 IS는 인질 2 명의 참수 계획을 밝혔고, 두 명의 인질은 참수되었다. 불필요하게 IS를 자극한 전술적 실패였다. 두 피해자의 가족은 아베 정부를 단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탓하기는커녕 인질 구축에 애쓴 정부에 감사한다.”는 말을 틈 날 때마다 반복했다. 개인에게 침묵의 인내를 강요하는 일본식 문화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을 이웃하고 있는 우리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할까?

첫째, 힘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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