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안

자료실

자유지 10월호 안보논단]중국.인도 국경 문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2017.10.12 Views 1812 관리자

중국-인도 국경 문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임방순

중국과 인도는 1962년에 국경분쟁이 있었지만 그 후에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76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약 2개월 이상 양국은 히말라야 국경지역에서 군사대치를 하였다. 양국의 우호관계에 비추어 봤을 때, 무척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태는 무력충돌없이 8월 말에 군사 대치상태가 종료되었다. 중국이 인도에게 국경 월경 명분을 주었던 국경 일대의 도로공사 중단을 약속하였고, 인도는 이러한 중국의 조치에 따라 병력과 장비를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일대 군사대치 사태는 비록 우리와는 멀리 이격된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어 우리의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은 그리 크지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중국이 국경분쟁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살펴봐야할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한반도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바다와 하늘에서 각각 중국과 잠재된 갈등요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62년 중-인 국경분쟁의 원인

히말라야 산악에서 벌어졌던 중국-인도 국경 군사대치사태는 1962년 중국-인도 국경 무장충돌과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당시 인도와 중국은 대규모 무력충돌을 했지만 양국은 국경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국경은 애매한 상태로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중국-인도 국경 영토분쟁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겠다.

당시 분쟁의 원인은 크게 세가지로 첫째, 인도를 식민지배한 영국이 국경문제를 불분명하게 처리했기 때문이고, 둘째, 중국과 인도 사이의 완충역할을 했던 티베트가 중국에 점령되어 중국과 인도가 직접 국경을 맞댄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인도는 중국의 티베트 점령이 인도를 향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로 인식하여 위협을 느꼈다. 셋째, 각국의 국내요인과 국제적인 역학관계의 변화를 들 수 있겠다. 본고에서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인 첫 번째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우선 영국은 식민지 국가인 인도의 국경을 자국의 이해에 따라 선을 그었다

지도 3-2에서 보듯이 중국과 인도는 대략 2,000 km 정도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분쟁지역은지도 3-3과 같이 인도 서부 카시미르(캐슈미르)-악사이친 지역 약 32,850 , 인도 중부 시킴지역 약 2,000 , 그리고 인도 동부 아루차날 프라데시주 지역 9이다. 전체면적은 대략 125,000 로 한반도의 절반보다도 큰 면적이다. 영국은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위해 전세계적으로 대립을 하던 중, 당시 식민통치를 하고 있던 인도에서도 국경지역을 자국이 통제하기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국경을 획정하여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 우선 인도 서부지역인 캐시미르 일대의 이슬람교도들을 타지역으로 추방시키고 악사이친 지역에는 자국에 우호적인 지역유지에게 그 지역을 인계하였으며, 그 일대의 국경선을 이해 당사자인 당시 티베트 정부와 중국 과 협의없이 역시 일방적으로 설정하였다. 은 티베트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이 지역은 티베트에 속하기 때문에 영국이 설정한 국경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인도서부 지역의 국경선은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은 채 이해 당사국 간에 전통관습선만 묵인된 상태였다.

인도 동부지역인 아루차날 프레데시주는 1914심라(Simla)조약을 주도한 영국에 의해 획정되었다. 19131013일 영국의 인도식민정부 외교부장 맥마흔(Sir. A. Henry McMahon)이 장개석 정부의 협상대표, 티베트 대표 등과 인도 서북부의 심라에서 티베트-중화민국-인도식민정부 사이의 경계를 획정하는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맥마흔은 중화민국 대표를 제외하고 국경선을 설정했는데 이선이 맥마흔 라인이다. 당연히 장제츠의 중화민국도 그후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맥마흔 라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인 티베트의 관할 지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같이 중국과 인도간에 명확한 국경선 없이 불분명하게 실효지배를 상호 묵인하고 있는 전통관습선이 존재하고 있어 항상 분쟁의 가능성은 남아있었다.

동부와 서부에 비해 중부지역은 1950년대 후반에 들어 문제가 되었던 지역으로 이번에 중국과 인도가 대치한 지역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속에서 1950년대 중국의 티베트 합병과 티베트의 독립저항 무력진압, 달라이 라마의 인도망명, 중국군의 악사이친 지역 도로 건설, 그리고 인도의 전진정책이 중국과 부딪히면서 19621010일 중국-인도 국경분쟁 무력충돌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중국군의 일방적 승리였으며 인도방향으로 평균 160 전진했으나 전쟁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중국군이 돌연 개전 2개월만인 1121일 일방적으로 전투중지를 선포하고, 195911월에 존재했던 실제통제선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국경선은 전쟁후에도 명확히 설정되지 않아 항상 충돌의 가능성은 남겨진 상태였다.

-인 국경 군사대치 상황과 중국의 철수 배경

중국은 부탄과의 국경지역에서 자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동랑(洞郞, 인도명 도카라, 부탄명 도클람)에서 2017616일 도로공사를 시작하자, 이를 발견한 부탄이 인도에 통보하고 인도는 부탄과 안보조약에 따라 618일 트랙터 2대와 병력 270명을 현지에 파견하여 중국군의 도로공사를 저지함으로 양국의 군사대치가 촉발되었다. 이에 대해서 중국은 자국의 영토내에서 도로공사를 하는 것은 주권에 해당하는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철수하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압박을 가하였다. 인도는 부탄과 중국은 국경문제가 타결될 때까지 국경지역의 현상태를 바꾸는 일방적인 조치를 하지않기로 협약을 맺었는데 중국이 이를 위반하였다.”라고 비난하면서 철수를 거부하였다. 인도는 중국의 도로건설이 인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실리구리(닭 모가지) 회랑을 위협하고 있어 강하게 반발하였는데 유사시 실리구리 회랑이 점령당하면 인도 영토는 동부와 서부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인도평원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지도 3-1 참조따라서 인도는 중국이 먼저 도로건설 중단을 약속한 다음 현 대치 지점에서 양군 동시철수를 주장하였다.

중국과 인도는 즉시 군사대비태세를 강화하였다. 중국은 동랑지역과 유사한 지형의 티베트 지역에서 76집단군이 보전포 합동훈련과 실탄사격을 실시하였으며, 인도군도 이 지역 일대의 주민 수백 명에게 소개령을 내리는 한편, 무장헬기 10대를 배치하였고 33군 소속 17사단

댓글 0개

비밀번호 확인
작성 시 설정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