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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8월호 안보논단] 대한민국 안보상황 신중하게 대처하자
2017.08.11 Views 1683 관리자
대한민국 안보상황 신중하게 대처하자
이정훈
안보와 통일 문제에 집중해온 필자는 한미정상회담 공동선언문이 자꾸 어른거린다. ‘조건에 기초한 한국군으로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조기에 가능하도록 협력한다.’는 문구가 특히 그러하다. ‘조건에 기초한’이라는 조건만 없다면 이는 완벽한 전작권 조기 전환 합의이기 때문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이 무엇인가.
안보와 국방에 대한 개념이 부족할 때 우리는 지휘(command)와 통제(control)를 구분하지 못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된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한국군에 대한 모든 지휘권(All command authority)을 이양하였다.
이 대통령이 말한 모든 지휘권은 통수권으로 이해된다. 통수권은 영어로 the prerogative of supreme command로 적기 때문이다. 통수권은 그 나라의 국가 원수만 갖는 고유한 권한이다. 맥아더 원수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지 않는 한, 그는 한국군에 대한 통수권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군에 대한 통제권을 가질 수 있다.
전쟁을 하다 보면 연합군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유엔군도 연합군의 일종이다. 이렇게 되면 어느 나라 지휘관이 지휘할 것이냐가 문제가 된다. 이때의 지휘권은 국가원수가 갖고 있는 통수권과 비슷한 authority to command이다. 따라서 군 지휘관이 행사하는 지휘권은 국가원수만 갖고 있는 통수권을 작전에 관해서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 된다.
연합군에서 지휘관이 결정되면 다른 나라의 군대는 그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 최고사령부의 사령관은 큰 작전을 결정하고, 일선 부대 지휘관은 작은 작전을 결정한다. 일선 부대의 작전은 최고 사령부가 만든 작전과 궤를 같이 해야 하니, 최고 사령부로 보내 승인을 받는다. 국적이 다른 부대가 작전에 관해서 최고 사령관으로 정한 이의 통제를 받는 것을 ‘작전통제’라고 한다.
맥아더는 이 대통령의 뜻을 정확히 알아듣고 한국군을 작전 통제했다. 전쟁이 끝나자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유엔군의 핵심인 미군은 한국 방위의 상당부분을 책임지게 되었다. 미군 대장(초기에는 극동군사령관, 극동군이 해체된 다음에는 8군 사령관)이 유엔군 사령관을 맡은 유엔사가 한국군을 계속 작전통제하게 된 것이다.
1971년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 벌인 핑퐁 외교 때문에 깜짝 놀랐다. 이 외교는 놀랍게도 1964년에 있었던 중국의 핵실험에서 비롯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에 중국은 30만이 넘는 대병력을 참전시켰다. 유엔군 및 한국군과 혈전을 벌인 것이다. 그러한 숙적을 미국이 친구로 선택했으니 세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6.25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르며 공산주의를 지켜준 중국은 소련에 대가를 기대했다. 당시 중국은 핵개발에 대단한 관심이 있었기에 소련에 기술 이전을 요청했다. 소련은 줄 듯 줄 듯 하면서 차일피일 미뤘다. 이것이 문제가 돼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공산당대회에서 양국은 서로를 수정주의자와 교조주의자로 비난하게 되었다.
1958년 금문도와 마조도에서 중국, 대만간의 포격사건때 소련에 매달렸으나 외면당했다. 이듬해 티베트 독립 투쟁시 인도의 티베트 지원을 소련이 도와준 사건 등으로 중소갈등이 점점 커지자, 소련이 중국에 보내줬던 모든 핵과학자들을 철수시켰다. 소련이 적대적으로 돌아섰다고 판단한 모택동은 큰 위기를 느낀 듯 원자탄과 수소탄, 핵잠수함, 미사일의 연구를 결심하면서 “1만 년이 걸려서라도 핵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국은 소련이 핵연구 협력을 파기한 날이 1959년 6월이라 이 사업을 ‘596계획’으로 명명했다. 이 사업은 중국 10명의 원수 등 중 한 명인 섭영진(聶榮臻)이, 실무는 재미 과학자 출신인 전학삼(錢學森)이 맡았다.
상해 교통대학 출신인 전학삼은 일찌감치 도미해 MIT를 거쳐 칼텍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의 미사일 개발에 참여했었는데, 1950년 중국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아 5년간 감금되었다. 6·25전쟁이 끝나자 미중은 포로 교환을 하게 됐는데, 그도 교환대상이 돼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전학삼 등의 노력으로 1964년 중국은 아시아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러자 앙숙인 미국과 소련이 손을 잡았다. 양국은 중국의 핵능력을 파괴하기 위해 중국의 핵시설을 외과수술하듯 정밀타격(surgical strike)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이다. 1969년에 소련이 중국의 핵 기지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모택동은 새로운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미중 갈등 이상으로 중소분쟁은 커져간 것이다. 그리고 1969년 3월 진보도 사건(러시아명: 다만스키 섬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싸움으로 양국은 국경에 배치한 60만(소련)과 80만(중국) 대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이를 본 미국은 중대한 노선 전환을 결정했다. 소련과 다투는 중국의 핵무장을 인정해 친구로 끌어들이고, 소련을 고립시켜 먼저 무너뜨리자고 한 것이다. 이를 입안한 이가 키신저 보좌관인데 그는 핑퐁외교를 하며 중국에 접근했다(1971). 그해 미국은 대만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서 물러나게 하고 중국을 집어넣었다. 세계는 화들짝 놀란 것이다.
그러자 중일전쟁을 치른 숙적 일본이 바로 중국과 수교하고(1972) 미국도 중국과 수교했다(1979). 핑퐁외교로 시작된 서방권과 중국의 이러한 화해를 ‘데탕트’로 부른다. 데탕트 분위기 속에 베트남의 공산통일을 비롯한 인도차이나의 공산화가 이뤄졌다. 기세가 오른 공산국가들은 유엔이 공산국가의 침공을 막기 위해 만들어 한국에 배치한 유엔사 해체를 주장했다. 카터 미국 대통령은 이를 수용하려고 했다.
안보위기를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유엔사 해체에 대비해 미군을 설득해 한미연합사를 만들고(1978), 한미연합사가 한국군을 작전통제하게 했다. 그리고 유엔사는 유명무실해졌기에 유엔사 해체 주장도 사라졌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인도차이나 공산화라는 손해를 입으며 기다린 미국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은 독일 통일을 맞이하고(1990), 소련 붕괴라는 대망을 이룬 것이다(1991).
한미정상회담이 있기 전 핑퐁외교를 매개로 한 중국 핵실험에서 소련 붕괴까지를 기억한 이들은 미북 평화협정과 수교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금 중국과 북한 사이는 결코 좋지 않다. 그런데 미국을 상대로 북중은 이따금 합세해 공동 대응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하며 평화조약을 맺고 중국을 먼저 붕괴시키는 쪽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베트남처럼 공산 통일이 되는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매의 눈’으로 한미정상회담을 지켜봤는데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조기 전환’이 합의 됐으니 철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넘기면 한미연합사는 존재할 이유가 사라진다. 유엔사는 존속할 수 있지만, 유엔사는 거느리고 있는 부대가 없다. 주한미군이 유엔사에 들어가지 않으면 유엔사는 껍데기뿐이다. 그런데 유엔사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도 없다.
전작권을 전환했다고 주한미군 철수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위기가 일어나면 한국군과 주한미군(Kor Com으로 약칭)은 각자 대비에 들어가는 식으로 대응을 하게 된다. 같은 전쟁을 두 개의 사령부가 하게 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작전통제권 충돌이 일어나니 다시 통합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위기를 한국은 미국과 같이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나라는 항상 작전통제권을 요구한다. 베트남전에 파병됐던 한국군도 작전통제권을 장악했었다. 한반도에 위기가 발생하면 지원을 해주는 미군이 다시 작전통제권을 요구하게 될테니 ‘돌고 돌아 원위치’를 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전작권을 전환한 것은 한반도 위기를 초래한 원인만 되었고, 그 위기에 대처하는 방안은 다시 전작권을 내주는 것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작권 전환을 조기에 추진할 이유는 적어진다. 박근혜 정부는 전작권 전환을 연기했는데 신정부는 조기 전환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안보는 하나인데 방법면에서 널뛰기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필자의 촉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안보는 교과서적으로 지켜가는 것이 좋다. 널뛰기가 많으면 허점이 노출돼 위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의 신뢰를 얻어야 하니 북한에 적대적인 미군이 전작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한국군이 전작권을 가져 오면) 북한이 기회가 왔다고 보고 도발한다는 주장도 있다. 어느 것이 교과서적 이해인지 신중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안보 널뛰기를 그만하기 위해서라도. 한미정상회담을 마치고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4일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